고려와 조선 시대의 신분제는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구조를 반영하며 각 시대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두 시기 모두 엄격한 신분제를 기반으로 사회가 운영되었지만, 고려와 조선의 신분 체계는 사회의 변화와 왕조의 성격에 따라 차이를 보였다. 고려는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신분제와 유동적인 계층 이동을 허용했으나, 조선은 유교적 이념에 따라 더욱 경직되고 세습적인 신분제를 강화하여 신분 간의 구분을 명확히 하고, 계층 이동의 가능성을 줄였다.
첫째, 고려의 신분제는 상층 귀족인 문벌귀족과 중하층의 일반 백성들로 구분되었으며, 특히 고려 초기에는 귀족 간의 결혼과 혼맥을 통해 정치적 권력을 유지하는 경향이 강했다. 고려의 신분제는 대체로 귀족(문벌귀족)과 중인, 일반 농민 및 천민으로 나뉘었는데, 귀족들은 왕족이나 고위 관리 집안 출신으로, 중앙 정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고려는 비교적 개방적인 사회로, 귀족 출신이 아니더라도 능력에 따라 관직에 오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며, 특히 과거 제도를 통해 신분 상승의 기회가 열려 있었다. 또, 무신정권기나 원 간섭기 등 사회적 혼란기에는 신분제의 경직성이 완화되어 신분 이동이 가능했으며, 신흥 세력들이 등장해 기존 귀족 계층을 대체하기도 했다.
둘째, 조선은 고려와 달리 유교 이념을 중심으로 한 엄격한 신분제를 기반으로 하였다. 조선의 신분제는 양반, 중인, 상민, 천민으로 나뉘었으며, 이 체계는 신분 상승의 기회가 극히 제한된 경직된 구조였다. 조선의 양반은 정치,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지배적인 계층으로, 관직에 오르거나 과거 시험을 통해 양반 신분을 유지하고 세습하는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중인은 기술직 관료나 의사, 역관 등 특수 직업군으로 구성되었으며, 상민은 대다수의 농민과 상공업자 등으로 이루어졌다. 천민은 노비, 백정, 기생, 승려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가장 낮은 신분으로 사회적 차별을 받았다. 조선의 신분제는 세습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특히 천민 신분은 대대로 이어져 계층 이동이 매우 어려웠다.
셋째, 조선의 신분제는 성리학적 유교 이념에 따라 더욱 철저하게 운영되었다. 유교적 이념은 조선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기본적인 틀이었으며, 이러한 이념에 따라 양반 계층은 유교적 덕목과 학문을 중시하며 그들의 지위를 정당화했다. 조선 시대에는 유교적 윤리와 덕목이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으며, 양반 계층은 이를 통해 자신들의 지배권을 정당화하고 사회적 특권을 누렸다. 이에 반해 중인과 상민 계층은 학문적·정치적 권리에 있어서 양반보다 제한된 지위에 있었으며, 특히 천민은 그들의 신분상 학문이나 사회적 권리를 거의 보장받지 못했다. 조선의 신분제는 유교적 가치관에 의해 철저히 유지되었고, 이는 신분 간의 상호 이동을 어렵게 만들었다. 또한 혼인 관계나 사회적 교류 역시 신분에 따라 철저히 구분되었으며, 이는 조선 사회의 계층 고착화에 기여했다.
마지막으로, 고려와 조선의 신분제 차이는 각각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에 따른 변화에서 기인했다. 고려는 비교적 유동적인 신분 이동이 가능했으며, 특히 무신정권기와 몽골의 간섭을 받던 시기에 신분 구조가 다소 유연하게 운영되었다. 이에 비해 조선은 왕권을 강화하고 성리학적 이념을 통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신분제를 더욱 경직되게 운영하였다. 특히 양반과 천민 간의 차별은 매우 컸고, 조선 후기로 갈수록 신분제의 경직성은 더욱 강화되었다. 하지만 조선 말기에는 이러한 신분제의 모순이 드러나면서 상민들이 양반으로 신분 상승을 시도하는 사례가 점차 늘어났고, 이는 조선 후기 사회의 변화와 함께 신분제 붕괴의 단초가 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고려와 조선의 신분제는 각 시대의 정치적, 사회적 배경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고려는 상대적으로 신분 이동이 가능했던 반면, 조선은 성리학적 질서를 바탕으로 한 엄격한 신분제를 통해 사회적 계층을 고착화하고 지배 계층의 권위를 유지하려 했다. 이러한 차이는 두 왕조의 성격과 사회 구조를 명확히 드러내며, 한국사에서 신분제의 발전과 변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